Jo on the flo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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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언니 노릇 생각 thoughts

어제 뮤지컬을 보고 오는 길에 선아랑 알콩달콩 한참 대화를 나눴다. 선아는 고모 딸, 초등학교 6학년이다. 대화 중 원래 책을 싫어했는데 요즘 책이 좋아졌다는 말을 하더라. 소설을 좋아하냐고 물으니 그래도 소설이 좋지 않아, 하고 되묻길래 나는 소설 별로 안좋아하거든, 하고 대답했다. (별로 안좋아하지만 따져보면 제일 많이 읽는 건 소설 -_-;)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럼 뭐 읽어?" 하고 묻는데, 막상 대답을 하려니 이게 어려웠다.

비소설 분야는 넓다. 정말 넓다. 그런데 뭐라고 표현이 안되더라고. '88만원의 세대'를 초등학생에게 설명하자니 경제'학'도 아니고, 사회'학'도 아니고, 사회'비판'도 아니고, 현실'고발'도 아니고... 또 어떻게 보면 저게 다 맞는 말이고. 에세이(아 이것도 정말 넓은데), 미술서적, 시, 여행서, 인물서, 추리소설 등등 주섬주섬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예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몰라 책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할 지경.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비소설들은 '비소설' 말고는 뭐라고 카테고리를 말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이기적인 유전자'는 생물학도 아니고 사회학도 아니고 역사학도 아니면서 셋 모두에 포함되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뭐라고 딱 규정하기가 애매하다.

시사인 정기구독을 시켜주고 싶어도 아직 어려워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집안 분위기 상 약간 조심스럽다) 이번 호 '편집국장의 편지'를 읽어보라고 줘봤다.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는 단어가 있으면 그 때 그 때 말하라고 했더니 '프락치', '어청수', '비토층', '이간질'을 꼽았다. 조갑제와 김영삼도 나왔는데 어청수만 꼽은 걸 보면 다른 두 사람은 들어봤다는 뜻일테고, 나머지 단어는 초등학생에게 어려울 수도 있는 단어들. 그래도 생각보다는 텍스트를 잘 흡수하는 편인 것 같았다.

집에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다가 선아에게 비소설들을 소개해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무디가 글을 읽으면 사주려고 찍어놨던 보리 국어사전을 미리 사서 같이 빌려주기로 했다. 초중등생용 사전이니까 선아가 지금부터 보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 쯤이면 필요가 없어지는 사전이다. 그럼 그 때 무디에게 전달~ 그 이후에도 간직하고 싶어하면 당연히 그냥 간직하라고 주는 거고. 선아를 위해 새 책을 사는 건 솔직히 오바고 (..)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선아도 볼 만한 책을 빌려주는 거다. 사전이랑 같이. 사전은 삼년 정도 빌려주는 거고, 책은 일주일 쯤. 안 읽히면 애써서 읽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달라고 할 예정. 지금은 책 읽는 행위 자체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단 제일 먼저 빌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책은 잠바. 그 다음은 인생9단. 그 다음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그 다음은 시대의 우울. 그 다음은 연인. 그 다음은 소박한 밥상. 비소설이면서 분야를 다양하게.

그러고 보니 선아에게도 마리아(선아 언니, 고등학생)에게도 책을 선물한 적이 있다. 별 이유는 없었고 내가 그 나이 때쯤 읽었으면 좋았었겠다, 하는 책을 발견했을 때였다. 마리아를 사줬던 건 그리스로마신화 중 내가 가지고 싶었던 버전이었는데 선아는 어떤 걸 사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비슷한 이유로 골랐을 거다. 그 시절의 내가 좋아했을만한 책.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의 내가 갖지 못했던 게 안타까운 책.

어제 대화를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제목이 끌리는 책을 꺼내서 뒤적이다가 제자리에 꽂는 것을 반복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도서관에서 그러고 있었고, 그러다 제자리에 꽂아놓기 싫은 책은 빌려와서 읽곤 했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어려운데, 구체적인 사안마다 스스로 인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크린이 작은 극장을 좋아하는데 선아는 큰 편이 좋다고 하길래 "스크린 작은 상영관 가봤어?" 하고 물었더니 안가봤다고 대답한다.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했더니 대답을 못한다.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것을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니, 세상에 없다는 생각 조차 하지 않는 것. "이상하지?" 하고 물으니 끄덕끄덕. "언니랑 같이 스크린이 작은 상영관 (나의 씨네큐브 2관 +_+) 가보자. 그리고 나서도 스크린 큰 게 좋으면 그 땐 정말 '선아는 스크린이 큰 상영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 했더니 또 끄덕끄덕.

심지어는 남은 알고 나는 모르는 나의 모습을 누군가 이야기 해줘도 그것을 듣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나서야 자기가 자신의 그런 모습을 알게 된다. 내 동생, 언젠가 "너는 밤에 먹는 야식은 전자렌지로 2분  이상의 조리과정이 필요하면 안해먹잖아." 했더니 10초쯤 갸웃, 하더니 갑자기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정말 그런 거 같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때 내 동생이 그 말을 듣고 갸웃하던 10초가 없었더라면 내 동생은 자신에 대한 사실 한 가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을 거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이 어렵듯이, 내가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작업도 어렵다. 개인적으로 이건 '배운다'기보다 '경험과 훈련'을 통해 '발견하는' 것 같다. "짧은 세상 살면서 좋은 것만 하고 좋은 것만 보고 하기도 시간이 부족한지 않겠어? 내가 읽어서 좋고 재미있는책을 고르는 재주가 그래서 필요한 거 같아. 일단 책읽기든 뭐든 나 좋으려고 하는 거 아니겠니~" (시간이 지나면 어떤 책은 읽는다는 작업은 재미있다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그 다음 단계에 느껴지는 재미와 기쁨 때문에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나중에) 나는 '글을 읽는다는 행위'가 짐으로 취급되는 것이 싫어서,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하게 '재미'를 중심으로 접근한다. 지난번에 내 동생처럼 글읽기를 무겁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로는 더더욱. 선아도 좋아하는 책을 고르는 방법을 놀이처럼 터득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서점보다는 도서관을 더 좋아하는데, 학생일 때는 도서관을 매일의 생활에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게 참 부럽다. 나 '국민학교' 다닐 적에는 정말로 우리 학교 도서관에 있는 책 중 읽은 책이 안 읽은 책보다 더 많았다. 시골 학교라서 책이 많지 않았고 책을 좋아하는 아이도 별로 없었는데, 6학년 때 담임이셨던 도시에서 오신 선생님은 "이렇게 책 안읽는 학교 처음 봤고, 쟤 같은 책 버러지도 처음봤다! 벌레도 아니고 버러지야!"(좋은 뜻으로, 그리고 듣는 내가 오해 안하게 좋은 말투로 하신 말씀;;;) 라는 말씀을 종례시간마다 거의 매일 하셨었다 -_-;

내가 안타까워 하는 점은 그 때 도서관에 질로 있었던 세계 무슨무슨 한국 무슨무슨 책들을 읽은 이후로, 중고등학교에 가면서 그 책들을 '읽은 책' 취급을 했다는 점이다. 초등학생용으로 줄거리 위주로 정리되었던 그 책들을 좀 더 세심하게 읽을 기회가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중에서도 심하게 좋아했던 제인 오스틴 같은 경우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읽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세계 명작은 그렇게 잊혀졌다. 주인공 이름도, 줄거리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읽은 책'으로 취급했던 것. 그래서 완역판(또는 완역판에 좀 더 가까운 책)을 읽을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 참 많이 아쉽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참 내가 늙기는 늙었나보다, 애를 앞에 두고 옛날 얘기나 하고 있고, 하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자려고 누웠더니 [오늘좋은말고마워~^^]라는 문자가 왔다. 저런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좋은 말'로 들어주었다니, 내가 고맙지. 더 많은 사람들이 '글'과 가깝고, '글'을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바람이다. 그래서 더 좋은 글들이 세상에 나오고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동생에게 시사인을 성공적으로 소개했던 것처럼, 선아가 책을 좋아하게 되는데 요만큼이라도 기여하는 '사촌언니 노릇'을 하게 된다면 정말 기쁠 것 같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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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H 2008/07/10 21:44 # 삭제 답글

    잠바. 그 다음은 인생9단. 그 다음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그 다음은 시대의 우울. 그 다음은 연인. 그 다음은 소박한 밥상. 비소설이면서 분야를 다양하게.

    ------> 이념적 편향이 보입니다.

    분야를 다양하게 하려면 조갑제닷컴에서 출간되는 다양한 도서를 추가함이 옳은줄로 아뢰오.
  • 우람이 2008/07/11 00:03 #

    누가보면 진담인 줄 알겠소 오라방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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