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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 추도식 생각 thoughts

양력 8월 2일은 증조할머니 추도식. 나는 우리 세대 사촌 7남매 중 증조할머니와 가장 가까웠다. 21살이었던 엄마가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와서 햇수로 8년 동안 '시할머니'를 모셨고, 나는 그 집의 첫 아이였다. 3년 터울의 남동생까지 보시고 내가 7살 때 돌아가셨으니 당신은 보고싶은 것 다 봤다며 편히 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증조할머니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신다. "한 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하신 일은 절대 관여 안하시는 분이었어. 지금도 그런 어른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가지고 있는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내가 할머니를 구박(?)하던 일이었다. 증조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탓에 할머니는 할아버지 산소를 자주 찾으셨다. 집에서 걸어서 5분, 우리 집 논밭 울타리 한쪽에 있던 증조할아버지의 산소는 나와 동생이 방아깨비를 잡으러 즐겨찾던 곳이었다. 시골에서 잔디가 깔린 곳은 산소가 거의 유일했기 때문에 방아깨비를 잡기에, 그리고 누워서 놀기에 제일 좋은 곳이 산소였다. 나는 증조할아버지 얼굴을 뵌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산소는 그냥 눕기 좋은 잔디와 흙소파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할머니를 구박했다는 건 내가 유난히 할머니가 산소에 가시는 걸 싫어했다는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 입장에서는 산책도 할 겸 먼저 간 신랑을 찾는 게 구십 넘어 소일거리인 게 당연한데, 그 때 난 있지도 않은 사람을 찾아 힘들게 걸어다니시는 게 싫었던 것 같다. 없는 사람 그리워해봐야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할머니 마음만 슬플 거라는 그런 생각. 7살이 되고 유치원을 다니면서 부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을 뒤져(?) 할머니가 있는지 확인하고, 거의 매일 산소로 잡으러(?) 달려가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의 손을 잡아 끌고 돌아오면서 투덜투덜 하던 기억도. "아 여기 좀 그만 오라니까안~"

할머니는 나를, 나는 할머니를 끔찍이 아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추도식이 둘 다 여름방학 기간이라 추도식 날이면 서울 할아버지 댁에 모였는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할머니 추도식 날이면 서울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달을 보며 울었다. 집 안에서 울면 작은엄마가 혼내셨기 때문에 눈물이 나면 밖으로 나왔다. 정말로 달 속에 할머니 얼굴이 달래주는 것 같았고... 돌아가시기 직전 일주일 동안은 아무 음식도 드시지 못했는데(그래서 가까운 친지들이 날을 예상을 하고 다들 우리 집으로 모였다고 한다), 내가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가져다 드리면 금방 게워낼 걸 아시면서도 그것만은 사양 않으시고 한참이 걸려도 끝까지 드셨다고 한다. 이 얘기는 매 년 할머니 추도식 날이면 되풀이되는 이야기다. "얘가 그거 들고가면 그건 싫다고를 못하시고 받아드셨지..."

내가 그보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막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 때는 할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셨다고 했다. 하루 종일 사람을 끌고다니며 물건 이름을 말 해 달라고 손가락으로 집안 곳곳을 가리키는 나에게 하루에 백 번씩 "냉장고." "테레비." "선풍기."를 되풀이 하는 일은 할머니 아니면 하기 힘든 일이다.

엄마가 아직도 가끔 꺼내시는 이야기도 있다. 동생이 생겼을 때 맏이가 흔히 보이는 반응인 '질투'를 할머니가 한 마디로 잠재우신 이야기. 3년 터울로 생긴 동생에게 식구들이 관심이 온통 쏠리자 내가 질투를 하기 시작했고, 할머니는 그런 나를 앉혀다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쟤는 똥싸배기라서 똥 치워주느라 그런 거야. 쟤 6살 때까지만 참자. 응?" 그 이후로 엄마 표현에 따르면 난 [단 한 번도] 동생을 샘 내느라 투정을 부린 적이 없다고 한다. 대신 내가 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남긴 모든 글, 일기, 그림일기의 반 이상이 동생 그림, 동생 이야기로 채워졌다. 그 일기들은 엄마가 버리지 않고 모아두셔서 아직도 고이 남아있다.

7살, 증조할머니 장례식 날의 풍경은 몇몇 장면이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런데 내가 울던 기억은 없다. 시골 우리 집이었고, 마당에 천막이 쳐 있었고, 동네 사람이 많았고, 가까운 친척들은 황색이 도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할머니가 지내시던 방에 상이 차려졌고, 난 그 방 앞 계단에 서서 방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지켜보다, 마당에 나가 천막 한쪽에서 즉석에서 만든 널뛰기를 혼자 시소처럼 탔다. 상여가 나갈 땐 사촌들과 우르르 행렬를 쫓아 달려나갔다. 그 때 울고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를 달리 찾은 기억도 없다. 대신 할머니가 할아버지 산소를 찾으시던 것처럼, 할머니 산소에 자주 놀러다녔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산소의 모양 - 동그란 묘와 그것을 둘러싼 어깨 - 은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깨와 묘가 이어지는 구석은 정말로 품에 안기는 기분으로 몸을 쏘옥 넣고 기댈 수 있는 구조다. 그 자리에 기대고 누워 리코더를 불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할머니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거기서는 혼자 훌쩍거린 기억도 많다. "왜 안 나와? 나 보여? 난 할머니 안보이는데.."

오늘은 고모할머니 네 분 중 큰고모할머니 한 분만 오셨다. 증조할아버지 추도식이 바로 얼마 전이었기 때문에 (증조 할아버지 추도식은 음력이라 두 분 추도식 텀이 왔다갔다 한다.) 이번엔 서울에 사시는 분만 오신 거다. 큰고모할머니는 증조할머니와 얼굴이 많이 닮으셨다. 큰고모할머니가 조금 더 예쁘시다.

무디를 두고, 두 돌도 안 된 애기가 엄마가 유학갔다는 걸 알아듣고, 이해하고, 엄마 사진만 봐도 들썩들썩 좋아하면서도 찾지 않는 걸 보면 참 기특하면서도 딱하다, 고 했더니 고모할머니께서 "아가야, 머리 긁어봐." 하셨다. 정작 내가 못알아 들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여쭈어봤더니, 원래 멀리 간 사람 기다리는 아기가 있으면 머리를 긁어보라고 하는 거라고 한다. 그래서 아기가 앞이마를 긁으면 그 사람이 빨리 오는 거고, 뒤통수를 긁으면 돌아올 날이 멀었다는 뜻이라고. 나는 처음 들어보는 소리야, 했더니 엄마가 옛날엔 멀리 간 사람이 많아서 그런 말을 만든 것 같다며 엄마만 해도 많이 들어본 얘기라고 하셨다. 무디는 포도 알갱이를 따 먹느라 머리를 긁지 않았다. 고모의 유학은 최소 1년, 최대 2년 예정이다.

추도식도 결국 그런 의미일 거다. 일년에 몇 번 만날 일 없는 식구들, 서로 얼굴 한 번씩 더 보게 하는 거. 그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옛날 얘기도 하고, 모인 식구들 중 새식구, 특히 아기가 있으면 식구들이 아기 얼굴 한 번씩 더 보고. 우리집 추도식은 할머니 사진과 국화꽃을 상에 두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저녁을 먹는 순서다. 추석이나 설날은 아침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아침을 먹으니, 저녁이라는 점과 할머니 사진과 국화꽃이 있다는 점만 다르다.

할아버지와 큰고모할머니(할아버지 누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면 재미있다. 원래 옛날 얘기를 듣는 것도 좋아하고, 어른들 말투 속  내가 모르는 옛날 표현 듣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편이다. 그 중 제일 재미있는 것은 요즘 문화에 대해 두 분이 이야기하실 때다. 아까도 케이블에서 조폭마누라가 나오는데 결혼식장면을 보시던 고모할머니께서 한 마디 하셨다. "시집가는데 왜 웃통을 벗고 가. 내가 오죽하면 대통령이 저거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 웨딩드레스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ㅋ

사촌들이 많이 외국에 나갔고, 거의 집안 행사인 부흥회가 다음 주 월요일부터라 추도식치고 많은 인원이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해보는 일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예배가 끝나고 국화를 신문지로 싸는 일이었다. 엄마아빠가 시골에 내려가실 때 가져가시기 위해서 였는데, 꽃병에서 국화를 꺼내고, 물을 털어내고 신문지로 싸면서 '곧 할머니 산소 앞에 놓이겠구나.' 생각하니 산소를 소파삼아 기대 놀던 때가 생각났다. 그 땐 개미가 옷 속으로 들어와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신문지를 겹쳐서 세모 모양으로 만들어 국화꽃부터 대까지 다 감싸지도록 말았다. 그리고 하얗고 탐스러운 국화송이들을 손끝으로 한 번씩 쓰다듬었다. 나 대신 그 자리에 가서 할머니 안부를 물어주련, 말을 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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