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 on the floor :)

uram.egloos.com



소갈비와 떡볶이 생각 thoughts

오랜만에 지방 출장이 있었는데 이틀 연속 잠을 몇 시간 못 자서 새벽에 나갈 때부터 헤롱헤롱. 끼니는 포기하고 카페인으로 정신과 몸을 바짝 조인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나니 돌아오는 버스에서 맥이 탁 풀렸다. 8시 반쯤 서울에 도착해 돈까스가 먹고 싶어서 겨우 찾은 집에 갔더니 오늘 마감입니다... 그 때 생각났다. 집에 가자. 어제 아빠가 구워주신 소갈비 남은 거 싸온 거 있다.

어제 아빠가 서울에 오신 김에 동생이랑 셋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동생이 늦는대서 아빠랑 둘이 가서 먼저 갈비를 시켰다. 아주머니가 한 판 구워주고 가시니까 그 담부터 아빠가 자연스럽게 집게랑 가위를 들고 구워 주셔서 살짝 놀람.

양념 소갈비 먹고 싶을 때 가는 마포 우림집.
나 대학교 졸업식 날 여기서 밥 먹은 이후로 일년에 한 두 번은 간다.
엄청난 맛집도 아니고 단골이라기도 뭐한데 단골이 아니라기에도 뭐한 집 (..)
소 갈비 한 대가 이만오천원인데 양도 맛도 적당하고 생색내기 딱 좋다.


이것은 놀라서 찍은 사진... 늘 엄마가 해주셨는데 엄마가 안계시니까 아빠가 해주신 건가...? 아빠가 나한테 하는 거 반만큼만 엄마한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사이 동생이 왔다. 그리고 아빠가 밝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아들, 오늘 고기는 누나가 사는 거니까 많이 먹어!" (싱글벙글) 아하 그렇구나 아빠의 노동력을 돈으로 샀어 나 되게 머시땅 ㅇㅂㅇ ...이 아니라;; 평소엔 거의 내가 돌봄을 받는 편이고 이번엔 동생 결혼해야 되는데 돈 없어서 어쩌나 하는 얘기 땜에 만난거라 어차피 내가 사려고 했었다. 여튼 아빠가 되게 자연스럽게 고기 구워주시는 거 신기했다. 내가 뼈에 붙은 부분 좋아하는 거 아셔서 뼈에 고기 많이 남겨서 구워주심 ㅎ

셋이 저녁 먹고, 아아 한 잔씩 마시고, 난 급한 일 때문에 일찍 들어왔다. 아빠는 친구분이랑 술 한 잔 하시고 열두시 쯤 떡볶이랑 오뎅을 사서 들어 오셨는데 내가 안 먹으니까 되게 미안해하시며 어, 안 먹어? 허허허 이제 이런 거 절대 안 사올게, 하셨다. 근데 이 때 든 생각은 나한테 예의 지키는 거 반의 반만 엄마한테 좀 해봐요 아부지......

아빠는 책임감있고 성실한 가장이신데 엄마를 본인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여겼고, 두 분이 있을땐 그걸 숨지기 않았던 것 같다. 아빠는 똑똑한 사람이다. 타인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드러내지 않았고, 엄마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 집안에서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지혜롭고 순종적이었다. 안 좋은 일은 엄마 탓을 했고, 아빠가 거슬릴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두 분이 골프를 같이 시작하셨는데 엄마가 아빠보다 훨씬 잘하니까 엄마는 연습을 멈췄고, 아빠가 부부동반 모임에 갈 때만 필드에 나가신다. 엄마는 만능 스포츠우먼이거든. 고등학교 때 핸드볼 골키퍼였고, 지금도 문에 달린 풀업바로 턱걸이를 하신다. 볼 때마다 배우고 싶은데 난 매달리기도 잘 못한다. 팔로 하는 거 아니고 상체 힘으로 들어 올리라시는데 뭔 말인지 모르겠어............

페미니즘에 고마운 지점이 많지만 엄마는 괜찮다고 하시는 일이 나는 괜찮지 않아진 감수성을 준 것이 정말 고맙다. 엄마 그거 아빠가 예의 없는 거야, 엄마 기분 나빠해도 돼, 엄마가 잘못한 거 없어, 라고 말씀드릴 수 있게 된 것이 고맙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야, 엄마가 더 노력할게,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아, 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게 소름끼치기도 하다. 난 엄마를 뭘로 생각한 걸까.

아빠는 본인의 의무를 철저하고 성실하게 지킨 가장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남편의 의무를 훌륭하게 수행했고, 우리 남매에게도 더없이 좋은 아버지다. 자녀인 입장에서 나는 부모님 복을 크게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단, 아빠는 본인의 배우자에게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었고, 난 이 지점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논할 때 매우 큰 실패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빠 본인은 이 지점에 대한 각성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불가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최근에 집 문제로 아빠가 서울에 자주 오셔서 자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자식에게도 예의를 지킬줄 아는 사람이 왜 아내를 인간 대 인간으로 존중하는 게 안될까 정말 궁금해졌다. 작년에 시골에 2주 있으면서 본 아빠와는 너무 달라서 처음엔 적응이 안 되더라니까. 시골집에서 엄마를 대할 땐 예의의 ㅇ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엄마가 밥 다 차려놓고 식사하세요, 하는데 대꾸도 없다가 점심약속 있어, 하고 나가시는 걸 보고 경악했다. 엄마가 너네 아빠는 말이 없어, 라고 했을 때 말이 없다는 게 그런 뜻일 줄은.

근데 나한테는 너 먹지도 않을 거 사와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이런 거 사오지 않겠다고 사과하는 사람이라니.

어쨌든 그래서 오늘 늦은 저녁은 소갈비와 떡볶이.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