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 on the floor :)

uram.egloos.com



폭신한 무가 들어간 야채스프 일상 everyday

진짜 오랜만에 홈파티! 무를 통으로 사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라자냐와 함께 낼 국물 요리로 양배추와 소시지를 넣고 자주 해먹는 야채스프를 하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숟가락이 스윽스윽 들어가게 푹 익은 두터운 무를 꼭 넣고 싶었다.

몇 년 전만해도 파티 음식은 풍족한 게 제일이었다. 고기, 고기, 고기, 그리고 고기, 그 다음엔 설탕. 그런데 집에서 마시는 술의 주종이 맥주에서 와인으로 넘어가면서, 그리고 입맛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고기류는 적당한 메인요리 하나면 충분하고 제일 손이 자주 가는 메뉴는 샐러드, 야채스틱, 제철 과일이 되어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조금씩 그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맑은 수프 안에 포근하게 익은 무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고급 요리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당근도 평소보다 크게 썰어 덩어리 느낌이 나게 했고, 무와 당근이 물렁해진 후 국산 표고를 사람 수만큼 넣고 한 번 더 우르르 끓였다. 보고만 있어도 건강해질 것 같은 이런 야채스프를 라자냐에 곁들이고 싶었다.

오븐이 고장났다는 핑계로, 그리고 사먹는데 재미가 들렸다는 이유로 집에서 한 요리로 홈파티를 하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모든 게 좋았다. 처음에 모이기로 한 이유는 다같이 욕할 사람이 생겨서였는데, 그 사람을 헐뜯는 것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너와 나의 대응 방식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7시 반에서 9시 반까지는 시간을 확인하면서 먹고 마셨는데 9시 반에서 11시 반으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시간이 훅 가서 막차를 타야하는 친구가 시간을 확인하고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바지런하게 챙겨서 다같이 나가 배웅해줬고 무사히 막차를 탔다.

새 오븐은 이전 모델과 비슷하게 60만원 언저리를 주고 샀는데 아래 회전판이 없는 모델이라 처음엔 당황했다. 첫 광파오븐을 13년 넘게 썼는데 이번 제품의 사용설명서에 '본 제품의 권장 사용 기한은 7년입니다'라는 말을 보고 더 당황해서 그냥 다 이해하기로 했다. 여튼 첫 라자냐를 구워보니 기능은 예전 오븐과 아주 똑같은 것 같다. 190도에 호일 덮고 30분, 호일 없이 10분. 몇 시간 뒀다가 데울 때 다시 190도에 호일 덮고 10분, 호일 없이 10분. 이게 원래 나의 방법인데 처음에 왠지 불안해서 200도로 해서 치즈가 좀 탔다. 다음엔 원래대로 190도로.

나의 라자냐 레시피는 원래 화이트소스 대신 리코타치즈를 한 층 넣는데 이번에는 그냥 토마토소스만으로 했더니 중간중간 다양한 치즈를 넣었음에도 맛이 좀 비었다. 리코타치즈는 근처 수퍼에서 구하기가 힘들어서 빼고 하고 싶은 유혹이 강한데 다음 번부터는 그래도 꼭 넣어야겠다. 이번엔 부재료도 마늘만 많이 추가했다. 원래 느타리버섯 넣으려고 했는데 낮은 그릇에 구울 거라 그냥 마늘만. 다음에는 층을 하나 줄이더라도 말린 가지나 느타리버섯 넣어야지.

라자냐와 야채수프를 먹으면서 넷이 레드와인을 한 병 마셨고, 야채스틱과 치즈플레이트로 넘어가면서 한 병 더 마셨고, 새로 나온 꼬깔콘 카라멜맛과 오징어와 호두 같은 주전부리를 먹다가 와인을 다 마시고 우롱베리차로 마무리했다. 훅 가버린 9시 반과 11시 반 사이에는 아마 페미니즘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정신차리고 보니 내가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친구 중 한 명에게 쥐어주고 있었다. 빌려주는 거 아니야. 주는 거야.

오늘은 모임 회비가 없었다. 대신 냉장고에 빈 것의 리스트를 불러주며 이 중 사오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오라고 했더니 한 명은 딸기를, 한 명은 아이스크림을, 한 명은 계란 한 판을 사왔다. 가기 전에 계란후라이 하나씩 해 먹이려고 했는데 그것만 못했구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다음에 모일 땐 시장에서 족발과 치킨을 사다먹자고 했지만 그 때도 아마 라자냐와 탕 중 적어도 하나는 내가 준비하겠지. 야채스틱과 치즈도 내가 먹고 싶어서 해 둘 것 같다. 딱 네 명까지 편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식탁과 식기가 있는 것도, 새 오븐이 원래 있던 오븐처럼 자리잡고 기능하는 것도, 네 명이 마주앉은 식탁에 웃음과 대화가 끊이지 않은 것도, 우리집에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과 고마움이었다. 아침 수영을 다녀와서 잠시 더 누웠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시장에 나가 장을 보고, 찬바람이 들어오게 창문을 열어놓고 느릿느릿 야채를 손질하며 행복했다. 친구들이 예상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했지만 요리는 미리 완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바로 먹을 수 있었고, 집 정리를 할 시간이 없었는데 그럭저럭 정돈된 상태였던 것도. 누가 무심히 떨어뜨린 축복을 나와 우리집이 받아 홈파티 차림상에 내놓은 것 같은, 그런 날이었다.

무, 당근, 양배추, 양파, 마늘, 표고버섯, CJ 그릴비엔나 소시지.
일인당 요렇게.
낮에 미리 해뒀다가 먹기 전에 데오면 모양 유지가 잘 되는데
게으름 피우다 그러지 못해서 모양이 많이 무너졌다.
나의 홈파티 상차림은 치즈퀸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배, 사과, 파인애플을 한 입크기로 잘라서 샐러드볼에 담고
시나몬파우더와 꿀을 뿌려서 냈는데 '충격적으로 맛있었다'는 평이 ㅎㅎ
마무리로 차 마시는 거 좋아한다. 
동네언니가 호주 여행에 다녀오면서 사 온 시드니 T2의 우롱베리.

덧글

  • 2020/01/28 00:26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우람이 2020/01/28 13:20 #

    ㅎㅎㅎ 고마워 자네도 그 소설에 출연해야지..?
댓글 입력 영역